Home > 기사 전체 보기
총 1872건, 83/94 페이지
<양왕용의 시읽기 13> 조병무의 낙엽길 따라
낙엽길 따라
/조 병 무
새벽 산길 오르는 길목에
사푼히 다가오는
낯익은 길손들
언젠가 본 듯
수줍어 고갤 떨구며
어다로 가는 길인가
소곤소곤 귓속말
조용 조용
얼굴 붉히며
사르르 불어오는 바람 따라
빨간 노랑 빛 옷자락 흔들면서
흘러가 버린
초록의 연민
잊은 듯 잊은 듯
어디로 가는 길인가.
-《문학과 창작》 2015년 봄호...
<인문학수프 18> 외로운 조선
<인문학 수프 18> 외로운 조선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정호승). 누누이 말씀드린 바 있지만(‘인문학수프’ 여기저기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탄 저로서는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사...
<책상과 밥상 사이> 15. '유토피아'를 다시 읽으며
‘유토피아’를 다시 읽으며
영국의 정치가이자 법률가인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세상의 부조리를 역설과 유머, 냉소로 비판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해학이 넘치는 재담가이자 신랄하고 통렬한 언어로 서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결혼하고자 하는 처녀와 총각은 상대방 앞에서 홀딱 발가벗고 선을...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34> 황소가 사라졌다
황소가 사라졌다
/박명호 소설가
언제부턴가 멀리 지나가는 암소를 보며 질러대던 황소의 울음소리도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황소라는 이름도 사라졌다. 다만 종자번식을 위한 몇 마리 수소가 존재할 따름이다. 한우종자개량법에 의하여 우수한 수소들을 별도 관리하여 거기서 정액을 채취 공급한다. 나머지 수소들은 암소를 보고 소리질러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원래 ...
<가요산책 29> 이미자의 그리움은 가슴마다
이미자, 그리움은 가슴마다
/이승주 시인
나는 트로트다. 여전히 지금도 내 심장의 피톨과 내 정서의 여린 세포들은 트로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내게 있어 트로트의 애절한 가락과 비애와 상심의 노랫말은 그대로 내 피톨과 세포 안의 비애와 상심을 녹여내는 용해제였다. 나는 늘 트로트를 흥얼거렸다. 길을 걸을 때도 버스 안에서도 계단을 오를 때도 아, 가여운...
<양왕용의 시읽기 12> 박성순의 체념諦念
체념諦念
박성순
벗어라
이 세상 시비곡직
혈혈단신
올 때도 그러했고
갈 때도 그러 할 것이니
오랜 세월 동안
때가 묻어 잘 지워지지 않는 정
아옹다옹 지나고 보면
괴로웟던 것들이 더 아름다운 것
정으로 얽힌 추억으로 남는다
그대와 나
몇 겁의 인연이 있어 만났으리오만
오온이 개공*
한 세상 모두가 허상인 것을
품었던 미련일랑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33> 신허생전
신허생전 /박명호 소설가
하 선생은 남산골 오두막에 살았다. 그는 오로지 소설만 쓰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처가 가난에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놈의 소설 쓰기만 해서 무얼 합니까?" “아직 소설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였소."
"장사해서 밥벌이라도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배우지 못했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
문학풍류 2020 가을겨울 호 발간
<가요산책 28> 김치캣의 검은 상처의 부루스
김치캣, 검은 상처의 블루스
/이승주 시인
사랑 빼고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네 인생의 봄날의 설렘도 환희도 여름날의 정열도 가을날의 그리움도 슬픔도 그 수원지가 사랑인 줄 알아서 우리는 가슴을 적시며 노래를 듣는다. 비록 사랑이 가슴 아픈 상처라 하더라도 상처 없이는 어찌 이 비루하고도 남루한 한세상 건널까. 삶이 비록 곤고하여 사랑조차 쓸쓸...
<양왕용의 시읽기 11> 최휘웅의 지하철
지하철
/최휘웅
졸음 묻은 시간, 하품의 깊은 동굴 속에도 빛이 들어왔다. 흔들리는 어
두운 창에 기대어 명멸하는 기억을 더듬다가 깜박 잠이 드는 순간, 나일
강 어디쯤이었지, 파라오가 나타나 피라미트 지하 동굴로 인도한다. 미이
라들이 에워쌌다. 우중충한 눈빛이 엉켜 피를 말리는데 덜커덩 정차하는
굉음에 깼다. 미아라들은 줄을 서 내려가고 텅빈...
서지월의 만주詩行(11) 송화강 강물소리
송화강 강물소리
/서지월
2천년 전 주몽의 말이 먹었을 강물
그 강물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보면
갓난 아기 젖 먹는 소리
흰 저고리 검정치마 누이가
물동이 이고 물 길러러 오는 소리
새색시 머리 풀고 몸 푸는 소리
이불에 수놓인 목단꽃
벙그는 소리까지 들어있는
송화강 강물소리
<시작 노트>ㅡㅡㅡ
**만주땅에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해란강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32> 콰이江의 다리
콰이江의 다리
/박명호 소설가
냉탕수영은 겨울목욕의 백미다.
K는 온탕에서 반신욕으로 땀을 흘린 뒤 냉탕으로 가서 한 바탕 헤엄질 하고 탕 턱에 머리를 베고는 배영으로 누워 마무리한다. 그러노라면 늘 어떤 노래를 흥얼거린다. 기분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노래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나오는 대로 흥얼거린다. 그것이 오래된 그의 목욕 습관이다.
&lsqu...
<책상과 밥상 사이> 14. 수능을 앞두고
수능을 앞두고
코로나19가 모든 일상을 옥죄는 한해였지만 우리 수험생들은 힘겨운 시간을 잘 버텨냈다. 수능시험이 목전에 다가오자 상당수의 학생들은 불안하다며 적절한 조언을 해달라고 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불안하다. 수험생들은 불안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적당한 시험 불안(test anxiety)은 집중력을 높여주는...
악학궤범 다가기 <12> 계면조의 변질
왜 국악은 단조로운가? 계면조의 변질
<제민이 /가곡전수자>
국악은 현대인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대중 가수들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인기 스타이지만, 저같은 국악 성악가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국악을 배우고 듣는 시간이 너무나 적은 것도 커다란 이유일 것입니다. 학교에서 더 많이 국악을 공부하고 감상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
<인문학수프17> 사람의 욕심
사람의 욕심
욕심 없이 산다는 말은 언제나 모순(어법)입니다. 남 보기에 ‘욕심 없이’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욕심 없이 사는’ 그 욕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욕심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나저나 사람 욕심 중에 가장 원초적인 것, 가장 지극한 것이 '사람 욕심'...
<최서림, 시를 그리다 13> 분노의 미루나무
분노의 미루나무
최서림
가시 돋은 미루나무를 보았는가
가슴 치며 울기 좋은 나무를 보았는가
소리 내어 우는 나무를 보았는가
목덜미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몰아내려
크레파스로 미루나무를 그린다
응어리진 가슴에서 쫙쫙 분출되어
뻗쳐 올라간 분노는 가시 맺힌 가지가 되었다
마구잡이로 덧칠한 줄기,
육십을 넘긴 몸통은 아직도
종잡을 수 없는 혼돈...
<가요산책 27> 정원의 미워하지 않으리
정원, 미워하지 않으리
푹 잤다.
시상이 잘 안 떠오르거나 어떤 고민거리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개운하게 잘 자고 나면 어떤 영감이 문득 떠오른다. 정원의 「미워하지 않으리」를 들으며 이에 대한 시를 생각하다가 잠들었는데, 눈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와 함께 글감들이 떠올랐다.
목숨 걸고 쌓아 올린 사나이의 첫사랑
글라스에 아롱진 그 님의 ...
<양왕용의 시읽기 10> 강희근의 유등
유등
/강희근
내 몸에 글을 써다오
나는 흐르고 흐른 뒤 기슭이나 언덕
어디 햇빛
어디 구름들 아래 이그러지다가
생을 마치리라
글을 써다오
생이라면 글줄이 있어서, 먹물 같은
캄캄함이 있어서
택배로 사는 노동을 다하다가
마감 날 떳떳이 지리라
여인이 있다면 여인의 눈썹으로 뜨는 글
수자리로 가는 남자 있다면 남자의
태극기로 펄럭이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31> 감동커피
감동 커피
/박명호 소설가
비슷한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면, 어느 것이 꿈이고 현실인지 혼동할 수 있다. 진한 감동을 줬던 자판기 커피에 얽힌 두 사건은 십 년이 지난 지금 와서 둘 다 비몽사몽이 되어버렸다.
기차출발 시간이 조금 남아 역전 광장으로 나왔다. 커피를 뽑아 담배를 피울 요량이었다. 마침 광장 한 쪽에 자판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김선굉 시집
방랑 같은 걸 꿈꿀 수 없는 시절을 산다. 밀란 쿤데라식의 느림은 얼마나 사치인가. 나는 신천대로가 끝나는 팔달교 부근이 꽉 막히기를 기대하며 차를 몬다. 차가 금호강 느린 흐름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때, 나는 비로소 강을 굽어본다. 중금속으로 이제 얼음이 얼지 않는 강. 그 위를 걷는 겨울새의 처연함 같은 것. 거기 노을이라도 비칠라치면, 물결은 어린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