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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6.19 12:51
[가곡의 뿌리를 찾아서] 2. 조선의 풍류방 문화
/제민이 가곡전수자 겸 가수
안녕하세요. 정가 가수 제민이 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금하 하규일의 가곡 전승을 토론하였습니다.
금하는 20세기 초 이왕직 아악부에서 가곡을 가르쳤는데요.
그때 금하에게 가곡을 배웠던 소남 이주환이
오늘날 활동하는 가객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금하의 가곡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요?
19세기 조선의 풍류방입니다.
풍류방에서 가곡이 불렸으며, 그것을 금하가 배웠던 것입니다.
풍류방이란 예술 애호가들이 모이는 장소나 조직입니다.
풍류방의 예술은 가악(歌樂)이 주류이지만,
시나 글씨, 그림 등의 예술 장르도 향유되었는데요.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랑방 같은 곳에 모여
악인(樂人)은 노래와 음악을 연주하고, 시인(詩人)은 시를 쓰고,
서예인은 글씨를 쓰고 묵화를 그리는 모임.
그런 모임을 풍류회, 또는 풍류방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풍류방이란 말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확실하지는 않는데요.
조선 후기 영조, 정조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풍류방은 양반이 주도하는 모임이었지만,
천인이나 상민 계층의 음악 연주자나
노래를 부르는 여성 가비(家婢)들도 참여하였답니다.
풍류방의 악인(樂人)은 가곡, 시조, 가사 등을
음악에 맞추어 주로 연행하였습니다.
성악하는 사람을 가객(歌客),
가곡을 반주하거나 기악곡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을
금객(琴客)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가악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만 풍류방에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연주나 연행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더라도
예술을 감상하거나 재정적 후원을 하는 사람들도 풍류방에 있었습니다.
풍류방에 모이는 사람 중, 연주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을 통칭하여,
풍류객(風流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객(客)”이라는 명칭은 재인이나 광대에게는 쓰지 않았는데요.
가객이니 금객, 풍류객이니 하는 “객”의 호칭은
단순한 전문적 실기인이 아니라,
시문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풍류방 또는 풍류회는 민간의 모임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과 지방 관청의 행사에
예능인이 자주 참여하였는데요.
중앙과 지방 정부는 그런 예능인을 관리하는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음악과 무용 전문인을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과 교방(敎坊),
연기와 놀이 전문인을 관리하는 재인청(才人廳)이
바로 그런 기관입니다.
그런데 풍류회는 이런 관아의 조직이 아니라 여항의 조직입니다.
풍류방은 꼭 사랑같은 방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대(樓臺), 제각(齊閣), 정자(亭子), 정원 같은 공간도 연행 공간이 됩니다.
제각(齊閣)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는 집이라는 의미인데요.
제각(祭閣)에서는 제사도 지내고, 유생들이 모여 공부도 하였습니다.
이정(李婷 월산대군)의 풍월정(風月亭), 김수장(金壽長)의 노가제(老歌齊),
박효관의 필운대 산방(山房) 등이 유명한 풍류방입니다.
가악을 연주하는 공간은 많습니다.
궁중이나 지방 관청의 향연이나 의식, 민간의 잔치,
그리고 동제에서 가악은 연행되었는데요.
이런 곳에서 가악 연행의 목적은 가악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대비의 회갑연이나 일본 사신의 접대연에서 음악과 노래가 연주될 때,
가악은 축하나 환영 행사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반면 풍류방은 가악 연행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입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가악을 연행하고 감상하기 위해 풍류방에 모이는 것입니다.
가악 연행 자체를 위한 모임, 이것이 풍류방의 핵심입니다.
풍류방을 양반이나 중인 같은 상류 계층의 모임이라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풍류방의 본질은 계층과 상관없이, 예술을 애호하는 동호인의 모임인 것입니다.
풍류방은 일상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세속을 초월하는 영역입니다.
초월성이란 관점에서, 풍류방은 굿당과 유사하지만, 종교성의 의미가 강하지 않습니다.
풍류방은 예술 연행을 하며 사교와 유흥을 즐기는 모임입니다.
풍류방에서 연행하는 예술은 가창(歌唱)과 기악(器樂), 시(詩)입니다.
가창의 대표는 가곡창과 시조창인데요.
기악은 영산회상처럼 노랫말 없이 악기 연주만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시(詩)는 음영(吟詠)이나 시창(詩唱)의 형태로 연행하는데요.
음영(吟詠)은 중국의 문학 장르인 시부(詩賦)를 읊조리는 것이며,
시창(詩唱) 역시 한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노래로 부르는 형태를 가리킵니다.
조선의 풍류방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직 잘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풍류방 문화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풍류방 사례를 두 개 들어 봅니다.
풍류방 사례 1
1773년경 8월, 어느 날 밤. 몇몇 풍류객들이
서울 남산 아래 담헌 홍대용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담헌의 집은 서울 남산 기슭 영희전(永禧殿) 북쪽에 있었는데
그 집의 유춘오(留春塢)라는 정원에서 악회(樂會)가 자주 열렸습니다.
유춘오(留春塢)는 봄이 머무는 언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날의 일을 연암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스무 이튿날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風舞)는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화답하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자,
줄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前生)을 돈오(頓悟)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른 경우에는, 삼군(三軍)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은 한창 노래 부를 때는, 옷을 훨훨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여겼다.”[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하야연기·夏夜讌記)]
연암(燕巖)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나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습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속한 남양 홍씨 가문은 누대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의 핵심 문벌이었는데요.
마음만 먹으면 출세는 보장받은 혈통이었지만,
홍대용은 집안 전통과 달리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작은 아버지 홍억이 서장관으로 북경 사행에 참여하자,
홍대용은 홍억의 수행군관, 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이름으로 북경에 따라갔습니다.
중국 사행단에서 사신의 임무를 띤 대표적인 관원은
삼사(三使)라 하여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이 있었습니다.
국옹(麯翁)은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 : 1732~1815)의 일호(一號)입니다.
이한진은 명필로서 전서(篆書)를 특히 잘 썼을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으며, 퉁소의 명수입니다.
그는 홍대용, 김억(金檍) 등과 즐겨 합주(合奏)하였습니다.
풍무(風舞)는 김억(金檍 : 1746~?)의 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절충장군(折衝將軍) 김종택(金宗澤)입니다.
김억은 1774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금사(琴師)이자 가객(歌客)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금사(琴師)는 거문고의 명인이라는 뜻입니다.
풍류방 사례 2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풍류방을 유춘오악회(留春塢樂會)라고 부릅니다.
영조(1724~1776) 때의 풍류객 홍경성(洪景性)은 거기서 풍류를 즐겼는데요.
그 얘기가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집』(靑城集)에 전합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가야금을 펼쳐 놓고,
성경(聖景) 홍경성은 거문고를 잡고,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은 퉁소를 소매에서 꺼내어,
김억(金億)은 서양금(西洋琴)의 채를 손에 들고,
장악원(掌樂院)의 공인(工人)인 보안(普安) 또한 국수(國手)로서 생황(笙簧)을 불었는데,
담헌의 유춘오(留春塢)에서 모였다.
성습(聖習) 유학중(俞學中)은 노래로 흥을 돋우었다.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은 연장자라 상석에 임하였다.
맛있는 술로 약간 취하자 중악(衆樂)이 어우러져 연주되었다.“
이 모임 역시 홍대용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이한진과 김억이 여기에도 참석하였네요.
지난 사례에선 이한진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퉁소를 붑니다.
김억은 지난 사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였는데,
이번에는 양금을 연주하는군요.
공인(工人) 보안(普安)은 생황을 붑니다.
공인(工人)은 장악원 소속 악기 연주자인데, 악공(樂工)이라고도 합니다.
유학중(俞學中)은 영조 때의 가객(歌客)입니다.
김수장(金壽長)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고금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 54명을 수록하였는데요.
거기에 유학중은 유명 가객 이세춘(李世春), 탁주한(卓柱漢)과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용겸(金用謙)은 여러 벼슬을 거쳐 1778년 우승지가 되었고,
1784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오르고,
1786년 공조판서가 되었습니다.
박종채(朴宗采)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둘째 아들입니다.
박종채(朴宗采)는 『과정록』(過庭錄) 소재 「연암담헌풍류」(燕巖湛軒風流)에서
아버지 박지원(朴趾源)과 효효재 김용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당시에 선군(先君: 박지원)의 선배인 김용겸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았으며, 사람됨이 간명하고 옛스러웠으며
예로써 자신을 지켰다.
김용겸은 선군과 담헌[홍대용]을 만날 때마다
풍류가 넉넉했고 토론이 끊이질 않았다.”
풍류방은 시와 가악이 만나는 문화 공간입니다.
흔히 풍류방을 사대부나 중인의 문화라고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풍류방은 양반과 서민이 함께 만나는
예술 동호인의 모임입니다.
오늘은 조선의 풍류방 문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필운대 풍류에 대해 토론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민이의 정가 세계입니다.